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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사라져 가는 민족의 얼을 찾아낸 민속학자
    첨부파일 mdAQ3KVLQE.jpg

    임동권

    최연소로 시작해 17차례나 문화재위원의 자리를 지켜온 민속학자 임동권. 국내 민속학 연구를 개척한 1세대 민속학자로,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민속학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은 월산 임동권 박사는 안타깝게도 지난 2012년 11월 25일, 86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근대화의 격랑 속에서 사라져가는 민속 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몸을 던져야 했던 그가 강강술래, 은산별신제, 강릉단오제 등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사라져 가는 고유의 민속 문화를 정립하기까지 고군분투했던 치열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호기심 많고 꿈 많은 시절에는 소설가가 되려고 했어요. 그래서 국문학과에 들어갔죠. 그때 저의 지도 교수님이었던 방종현 선생님께서 방언을 채집하던 분이셨는데, 그분을 따라다니며 가방도 들어드리고 방언 수집하는 모습을 보다 보니까 저절로 제 입에서도 민요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민요를 기록하다 보니 스승님께서 소설이야 제가 아니어도 쓸 사람이 많지만, 민요 연구자는 없으니 민요를 연구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를 하셨어요. 그래서 선생님의 말씀대로 민요를 연구해 보니까 생각보다 재미있더군요. 그걸 계기로 대학 2학년 때 소설가의 길을 포기했어요. 그 후 민요를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속학까지 영역이 확장되었지요.

    제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민속학을 공식적으로 학문 세계에 편입시켜 가며, 최연소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우리 고유의 민속 자산이 갖는 현재성을 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한국의 민담](1972년)에 수록된 이야기 가운데 10여 편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거든요. 어머니는 초등학교가 없던 충남 청양군 장평면에서 6㎞나 떨어진 학교에 꼬박꼬박 저를 보낼 정도로 교육과 규범을 중시했던 분이셨어요. 마룻바닥으로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한겨울에도 양말을 신기지 않은 채 저를 학교에 보내셨지요. 집안이 비교적 넉넉하고 부유한 편이었는데도 그같이 하신 걸 보면 아마도 아들을 강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으셨던가 봐요.

    어머니께 훈련받은 그 같은 강단은 그 후 2차 세계대전 때 끌려간 텅스텐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할 때는 물론, 훗날 민속학자로 민요현장조사(field work)를 하며 산천을 누빌 때 더욱 든든한 저력이 되었죠. 요즘 사람들은 입으로는 개성을 외치면서도 `트렌드`라며 서로 닮아가기에 급급한데, 윗세대들은 자기 것에 대한 자존 의식이 매우 강했어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1966년 세상을 떠나셨지만, 살아 생전 제게 강인함과 자존의식을 키워준 분이셨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 저를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는 민속학의 선배도 동료도 없었지만, 제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민속학을 학문으로 알아주지 않던 시대에 분류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기에 정말 열심히 작업했습니다. 어찌 보면 외로운 길이었지만, 사실 그땐 외로운 줄도 힘든 줄도 모르고 민속학을 발로 쓰며 달려왔죠.

    그동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학문의 개념은 대개 중국의 한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에요. 그래서 시골의 농부들이 하는 이야기나 민담, 속담, 수수께끼, 민요와 같은 것은 학문으로 여기지 않았던 거죠. 그렇지만 외국에서는 이미 전래되는 노래나 이야기, 국민들의 생활관습 등 자기 민족 고유의 문화적 본질을 찾는 운동이 있었어요.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우리는 아리랑을 부르면서도 정작 아리랑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아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리랑이 어떤 것이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한다는 얘기죠. 동네 입구에 세워두었던 장승의 시초나 서낭당에서 고사를 지내는 이유도 학문적으로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받아도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밝히려고 했어요. 그 속에 한국 사람들의 심성이 들어있거든요.

    제가 민속학 1세대로 불리는데, 1세대인 만큼 어려움이 말도 못하게 컸어요. 초창기에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닐 때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고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당신이 무슨 학자냐? 민속학이 무슨 학문이냐?”고 따져 묻는 사람들도 있었죠. 그러나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일했어요. 평일엔 강단에 서고 주말엔 민요 채집을 다녔죠. 원고료로 아내 몰래 비자금을 만들어 답사 가느라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별로 없어요.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이에요.

    사람들이 ‘민속’이라면 천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민속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랬던 거예요. 우리 민족이 그 속에서 살아오고 성장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죠. 요즘도 민속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긴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우리의 민속을 빨리 발굴하고 학문으로서도 의미를 부여해야 해요. 그 속에서 한민족 생활사를 부각시키고 바르게 써야 하는 거죠.

    강강술래는 임동권 박사가 발굴하고 주장해서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등재한 첫 성과이다. 당시 원로 문화재위원들은 임 박사의 주장에 대해 시골 아낙네들이 모여 춤추는 것이 무슨 문화재냐며 반대했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강강술래는 2009년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1966년 강강술래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할 때 저보다 20~30살 많던 위원들의 반대가 쏟아졌어요. 동네 아낙네들이 팔월 보름날 모여서 손잡고 노는 게 무슨 문화재냐는 거죠. 그런데 어느 민족이든 전기가 없던 시절에 밤을 환히 밝혀주는 달밤을 축하하는 의례가 있거든요. 우리의 경우 노래와 춤이 잘 어울린 여성 주도의 강강술래가 그것이었고요. 심지어 아프리카 원시 문명의 사람들도 달밤이 되면 모여서 축제를 벌여요. 기후나 환경이 좋고 먹을 것이 풍성할 때 자연스럽게 축제가 열리는 거죠.

    그런데 외국에서는 그 축제가 노래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는 달랐어요. 노래로도 잘 만들어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우리만의 특색과 문화적 소산을 국가 지정 문화재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지요.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6개월이나 걸렸어요. 푸대접 받는 아낙네들이 한데 모여서 하룻밤 노래하고 춤추는 건 한국 여성사(史)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민족 유희라고 말이죠. 결국 오랜 설득 끝에 강강술래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인을 받아냈고, 200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가 되었죠.

    은산별신제는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서 전승되어오는 별신제인데 그것 역시 “무슨 인간문화재냐?”는 반대가 쏟아졌어요. 무당굿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였죠. 사람이 마음속에 지닌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면 말이 되는 거예요. 감동하면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고요. 노래만 가지고도 안 되면 일어나 춤을 추는 거죠. 이것이 예술의 형성 과정입니다. 원시 예술은 무당 세계에 도달해야 가능했어요. 과거에 우리나라의 직업가수ㆍ무용수는 무당이나 다름없었어요. 인간의 간절한 소원을 비는 것이라 지금 무용가들이 무대에서 하는 거랑은 차원이 달랐죠.

    은산은 제가 다녔던 보통학교(초등학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저는 중학교를 일본에서 나왔는데 그때 당시 일본에서 열린 축제를 보면서 ‘아, 어릴 때부터 봐왔던 은산별신제가 독특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죠. 어린 마음에 나는 나중에 저것을 드러내 보여야겠다고 다짐했었어요. 특별히 별신제는 백제 멸망과 관련이 있어요. 백제 유민의 한을 풀어주고, 특히 무주고혼(無主孤魂: 자손이나 모셔 줄 사람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혼령)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진혼굿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들의 영혼을 달래줌으로써 마을이 편안하고 무병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런데 무당이 나와 춤추고 노래를 부르니까 사람들은 굿을 하는 사람이 무슨 인간문화재냐 하며 반대 의견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목소리를 좀 높였죠. “국립대학 무용과를 나온 무용수만 예술가로 불러야 하나? 자고로 문화재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전통 속에서 유ㆍ무형의 원형을 찾아가는 게 아니냐?”고 말이죠. 그렇게 설득을 해서 1966년 어렵게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했습니다.

    임 박사는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강릉단오제와 은산별신제를 중요무형문화재로 등재시켰다. 강릉단오제와 은산별신제도 ‘임 박사는 굿 전문 위원이냐”는 동료 문화재위원들의 비아냥을 무릅쓰고 이뤄낸 성과였다. 임 박사는 우리 무속은 그 뿌리가 깊은 만큼 많은 민속 유산이 남아 있는 중요한 문화의 보고라고 평가했다. 그는 실제로 무속으로부터 많은 민속 자료를 발굴해 냈고, 많은 무속인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그 후 강릉단오제도 문화재로 추천해서 올렸는데 매번 무당만 올린다고 그러더군요. 강릉단오제는 유교와 무속을 합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을 제사하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하죠. 강릉단오제는 그 기원이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다만 매년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제를 지내고 3일 동안 굿을 벌였다는 기록이 내려오고 있어요.

    사실 무속을 빼놓으면 강릉단오제도 볼 것이 없어요. 예전엔 사람들이 굿판에 가면 신나고 재미있어 했어요. 젊은 아낙네들은 그거 보느라고 어린애 젖 먹이는 것도 잊을 만큼이나요. 그 정도로 굿판에 매력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강릉 단오제도 문화재 지정을 받아냈죠. 지금 생각하면 제가 젊고 패기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억지를 쓰듯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 게 아닌가 싶어요. 반대하시는 분들이 저보다 훨씬 윗사람들이었는데 말이죠. 사실 그것은 무속을 얕보지 말고 역사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보인 억지였어요. 하지만 결국엔 유네스코 세계유산도 됐잖아요? 안동 차전놀이줄다리기도 농촌 집단의 공통의식을 형성하는 의미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민속학을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지금 돌아보면 억지 쓰길 잘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민요 연구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노래, 즉 음악적 접근, 민중의 시라는 점에서 문학적 접근, 그리고 만인의 마음이 담겼다는 점에서 민속학적 접근이 있어요.

    이 중에서 제가 택한 것은 민속학적 접근입니다. 젊은 시절, 무거운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수집한 1만5천여 점의 시집살이 노동요 등은 이젠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유산입니다. 50년대까지는 민요 채집이 필기로 이뤄졌는데, 시골 노인들에게 민요를 청하고 받아 적다 보면 글 속도가 소리를 따르지 못하기 일쑤였어요. “할머니, 잠깐만”하고 기록한 후 다시 민요를 청하면 김이 빠지기도 했죠. 그렇게 채집했어요.

    민요라는 건 자기 생활의 호소예요. 마음의 호소죠. 느끼는 것을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 민요입니다. 유식한 사람들만 부르는 게 아니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도 부를 수 있어요. 생활 속의 공감이 있으니까요. 서민의 시각에서 생성된 노래이고, 민족의 심성이 배어있는 음악이 민요인 것이죠. 민요에는 구절마다 삶의 지혜가 가득해요. ‘아리랑’은 누구나 부르잖아요. 애국가를 잘 못 불러도 누구나 애국가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죠.

    민담은 절대적인 근거가 없어요. 옛날 옛적 어느 마을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해도 괜찮거든요. 소재의 근거는 확실하게 없어도 스토리만 있으면 돼요. 그러나 전설은 반드시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경주 불국사에 가면 불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증거물이 있는 거죠. 하지만 신화는 그 이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대를 입히기가 어려워요. 4천 몇백 년 몇 월 며칠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민담, 신화, 전설이 다 비슷해 보이고 같은 이야기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임동권 박사는 평생 동안 모은 민속 사진자료 3만여 점과 1만여 권의 도서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고, 중앙대에 1만6천여 권의 도서를 기증했다. 또 자신의 고향인 충남 청양군 장평면의 도서관에 서적 100여 권을 기증하는 등 민속학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다.

    제가 문화재위원을 하던 1960년대는 박정희 정부가 근대화 명목으로 미신 타파를 부르짖던 때였습니다. 사회혁신운동으로 새마을운동이 한창 일어났을 때였지요. `근면ㆍ자조ㆍ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어제보다 나은 내일의 새마을`을 만든다는 기본 이념과 국민 개개인의 생활 향상을 가져온 것은 좋았는데, 새마을운동이 큰 성과를 거둔 반면 우리의 민속 문화는 속절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전통이 파괴되던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정말 힘들었죠. 그래서 제가 한번은 내무부에 찾아가서 따졌습니다. 초가집이 우리 전통 가옥인데 왜 새마을 노래에 ‘초가집도 없애고‘’라는 가사까지 넣어서 죄악시 하느냐며 노래 가사를 수정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내무부에서 박대통령이 지은 가사여서 자기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하더군요.

    1970년대는 우리 민속 문화가 썰물처럼 사라져간 뼈아픈 시기였지요. 근대화의 바람 속에서 여성적인 민속 문화뿐만 아니라 남성적인 것도 많이 사라졌어요. 우선 농악이 없어져 버리니까 풍년놀이가 사라졌고, 농부들이 부르던 농요도 사라졌죠. 게다가 정부에서는 장승도 없애라, 서낭당도 없애라 하니까 눈에 보이는 문화가 다 사라져버린 거죠. 그런 식으로 고유한 전통과 옛것이 무너지고 사라져간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요. 사실 옛것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데 그때는 오래된 것은 다 낡은 것이고 나쁘다는 인식으로 없애버린 것 같아요. 이제라도 다시 생각해야 해요. 우리가 충분히 검토를 하고서 버릴 것은 버리고 채택할 것은 채택해야 하거든요. 그때 그것들을 버리기 전에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학문적으로 정리를 해야 했어요. 언제든지 정책과 그 시대 정치인의 이념이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것과 상반되는 시기가 있어요. 우리의 경우 그것이 근대사회를 겪으며 한꺼번에 몰려 왔으니까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죠.

    임 박사는 2003년 민속학의 발전과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월산민속학술상을 제정했다. 시상식 후 수상자 및 관계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으로, 맨 앞줄 가운데 있는 이가 임동권 박사다.

    저의 호를 따서 만든 상입니다. 후학들을 위해서 제가 만든 국내 유일의 민속학술상인데 7년째 이어지고 있어요. 민속학은 후원해 주겠다는 곳이 없으니 상도 없고 상금도 없습니다. 제가 민속학 1세대이니까 기록을 남기는 것 외에 후학들이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줄 책임이 있어서 스스로 만들었지요. 그동안은 제가 서술한 중ㆍ고교 국어교과서의 단오제, 우리나라의 옛 풍속 부분 등에 대한 인세로 상을 운영해 왔어요. 하지만 최근에는 교과서 개편으로 그게 끊어졌어요. 사람 일이란 게 이리저리 왔다 갔다 그런 거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기록은 그대로 남아 정확하게 증명해 줄 거예요.

    우리나라 민속학의 초석이 되었던 자료들을 다음 세대를 위해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문화재산은 공유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삶의 애환이 담긴 민중의 유산이 제 손에 있을 이유가 없죠. 그 밖에 사진 자료와 민요 자료를 수록한 카드와 당시 사용하던 녹음기, 카메라 등도 함께 기증했어요. 우리가 살았던 시대를 지금 사람들이 살 수는 없으니 자료로나마 공유했으면 좋겠고, 후배들이 잘 활용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2011년 가을엔 고향인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작은 도서관에 민속, 민요, 문학에 관련된 도서와 잡지 등 총 100권의 책을 기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평 작은 도서관을 이용해 우리 고유의 민속과 민요를 알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이었죠. 선구자가 없어서 발로 뛰던 저로서는 진실성 있는 민속학 연구가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언젠가 모 기관에서 팔도 민요를 조사시켰더니 학생들이 내 책에서 그냥 발췌만 했다고 하더군요. 요즘 학생들이 조금 더 진실성을 보여줬으며 좋겠는데 그런 열정이 없더라고요. 그게 참 안타까워요.

    제가 카메라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당시 저희 집에 카메라가 있었는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영상의 매력에 이끌렸죠. 나중에 민속학을 접하고는 더더욱 사진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지식은 글보다 시각적 자료를 통해 이해력이 배가되니까요.

    사람이 마음에 절실함이 생기면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제 경우는 그랬어요.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앞뒤 가리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찾아가서 두드립니다. 그래서 대학에 사진학과 개설을 위해 당시 문교부 장관을 만났습니다. 문교부에선 사진 찍어 네모난 종이에 인화하면 되는데 무슨 사진학과가 필요하냐고 되묻더군요. “사진은 광학 예술이며,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통해 차량 번호판까지 볼 수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죠. 결국 일본, 필리핀, 독일 대학의 사진학과에 대해 설명하고,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을 찍은 일본 기자의 자료를 제출한 후에야 우여곡절 끝에 1963년 사진학과가 태어났습니다. 지금 돌이켜 봐도 정말 감동적인 기억이죠.



    인간이 생존할 때 없어서 안 되는 세 가지가 있어요. 그건 바로 의복과 음식과 집, 의식주(衣食住)죠. 그 중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역시 먹는 거예요. 먹어야 살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세 가지 순서를 살펴볼 때 의식주(衣食住)순으로 말을 해요. 먹는 것보다는 의(衣)가 먼저란 말이죠.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예의` 때문인 것 같아요. 투철한 예절문화와 의식 때문에 식의주(食衣住)가 아니고 의식주(衣食住)인 거죠. 먹는 것보다는 예의를 먼저 갖추겠다는 얘기예요. 그건 아마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의복으로 예의범절을 갖추는 것, 요새 노출문화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요즘은 의복에서 예의를 찾아볼 수가 없어요.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란 말은 이제 사라진 지가 오래죠.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요즘 세태를 보면 마냥 안타까워요. 우리 민족의 장래와 전통 문화가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간혹 들고요.

    서구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자기네 것을 잘 정리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여유도 없이 일본이 와서 덮치고, 뒤이어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남겨두고 기록할 여유도 없이 다 버려졌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민속학 연구가 필요한 거예요. 민속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니까요. 그 가운데 잃어버린 민족의식도 회복해야 하고, 우리만의 고유한 정서와 예의 문화도 교육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대대로 그 속에서 살아왔으니까요. 새로운 것도 좋지만 옛것을 경시하는 새로움은 진정한 발전이라고 할 수가 없거든요. 하루 속히 우리 민속 문화의 소재 발굴과 함께 한민족의 생활사를 부각시켜서 학문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봅니다.

    임 박사는 학교에서 받은 월급을 집에 가져가지 못했다. 돈이 모이는 대로 민속 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기 때문이다. 고가의 카메라와 무거운 녹음기를 메고 다니는 민속 자료 수집 여행은 물리적으로 힘들기도 했고 간첩으로 몰리는 고초와 오해를 동반한 험난한 길이었지만, 어릴 때 쌓은 강단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956년 제주도에 민요를 조사하러 가면서 당시에는 무척 희귀했던 녹음기를 방송국에 통사정해서 한 대 빌렸어요. 그런데 녹음기가 얼마나 크던지 `밥상`만해서 두 사람이 겨우 옮겼어요. 그리고 길이 좁아 차로 녹음기를 옮길 수 없는 경우에는 노인들을 서귀포 여관에 모셔놓고 민요를 녹음했죠. 그런데 노인들이 녹음 테이프 돌아가는 걸 보고 신기해하느라 노래를 부르다가 자꾸 멈추는 거예요. 결국 녹음기를 보자기로 덮고 작업을 했죠. 그 후 일본에서 휴대용 녹음기를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달 치 월급을 몽땅 털어 일본 도시바 휴대용 녹음기를 구입했는데, 그때부터 민요 채집을 더욱 왕성하게 할 수 있었어요. 사실 말이 휴대용이지 지금의 노트북 컴퓨터 2대 만한 크기였으니 가지고 다니기에 참 힘들었어요. 정말 오래된 시절 이야기죠?

    그리고 또 1960년대에 강릉단오제를 조사하러 다닐 때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는 저를 주민이 간첩으로 신고해서 경찰서에 잡혀간 일도 있었고, 무녀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하려고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 무녀가 얼굴을 숨기려고 사진을 박박 긁은 채로 보내온 일도 있었답니다. 돌이켜보니 재미있는 기억이 많네요.

    민속학자는 자그마한 단서 하나를 통해서 어마어마하게 펼쳐지는 역사를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추리도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 민속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현장을 찾기보다는 과거 자료만 가지고 주로 연구하는데, 무엇보다 직접 현장에 다니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1950년대와 2000년대가 상상할 수 없이 달라졌듯이, 시간이 지나면 2000년대의 모습도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 민속의 관점으로 볼 때 무형문화재는 반드시 현장을 많이 가야 해요. 우리는 과거 보조금도 없던 시절, 발이 부르트도록 현장을 찾아 다녔어요. 각자가 받은 월급으로 버스 타고, 걸어 다니고, 사랑방에서 자고 거기서 밥 한 끼 얻어먹고, 그렇게 노래 듣고 민요와 전설을 수집하러 다녔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릴 때도 저는 서 있는데 제자들은 힘들다고 주저앉아 있더군요. 그건 체력이 약하다기 보다는 훈련이 덜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민속학을 한다고 해서 고전에만 치우치라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고전의 의미는 꼭 한번 짚고 넘어가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왜 그래야 하는지는 여러분이 직접 그 의미를 짚어볼 때 깨닫게 될 겁니다.



    출처 : 네이버 인물정보





    제 목  내용   
    [문화] 평론가에서 장관까지 이어령
      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평론가에서 언론인, 교수, 그리고 문화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해 온 그는 한마디로 놀라운 ‘창조자’다. 그의 글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을 뒤집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여든의 나...[more]
    [경제]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 전길남 박사. 일본 오사카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UCLA에서 시스템 공학을 전공한 그는 산업화에 뒤쳐졌던 한국이 발전하려면 고급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박사학위 취득 후 한국으로 향했다. 1970년대 말 컴퓨터를 국산화하자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 전 박사는1982년...[more]
    [사업] 허브 향보다 진한, 향기를 가진 남자
      2000년대 초반, 우리 사회는 웰빙(Well-being:신심의 안녕과 행복을 뜻함)이란 단어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는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 주었기에 `잘 먹고, 잘 살자`라는 기치가 사회 현상으로까지 확산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유기농, 친환경, 녹색(그...[more]
    [정치] 국제사회 이슈의 해결사, 반기문
    반기문(대한민국, 재임 2007~)은 1944년 대한민국 충북 음성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때 에세이 경시대회에서 수상함으로써 미국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잠시 만난 경험을 계기로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70년 외교부에 들어갔고, 1991년에는 외교부 유엔...[more]
    [경제] 한국 소비자 운동의 개척자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소시모)’의 창립 멤버로 외국에서는 판매 금지된 다국적 의약품이 한국에서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등 소비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송보경 교수. 소비자운동이 낯설고 소원했던 시절부터 소비자운동 한길을 달려온 그녀의 인생 이야...[more]
    [사회] 사라져 가는 민족의 얼을 찾아낸 민속학자
    최연소로 시작해 17차례나 문화재위원의 자리를 지켜온 민속학자 임동권. 국내 민속학 연구를 개척한 1세대 민속학자로,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민속학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은 월산 임동권 박사는 안타깝게도 지난 2012년 11월 25일, 86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근대화의 격랑 속에서 사...[more]
    [정치] 잡지·신문도 멀티미디어 EPUB으로 만들 수 있다
    전자책에 변화가 올까. 텍스트만 위주의 전자책이 <해리포터> 시리즈의 <예언자 일보>처럼 오디오와 비디오 재생이 가능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까. 빌 맥코이 국제디지털출판포럼(IDPF) 사무총장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빌 맥코이 사무총장은 7월4일 열린 ‘IDPF 초청...[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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